미국 하버드대 마크 램지어 교수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마크 램지어 교수가 지난 2월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 계약에 기반한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해 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 교수들을 비롯해 수많은 전문가들과 일본 학계조차도 램지어 교수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으며, 논문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연일 나오고 있죠.
램지어 교수는 논문에 대한 비판을 부인해 왔으나, 미 사사 주간지 뉴요커에 기고된 석지영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글에 따르면 "한국인 위안부가 작성한 계약서를 갖고 있지 않다"고 했으며, 위안부에 동원된 10세 일본 소녀가 "업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도 인정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번 램지어 사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어요. 일본은 여전히 전쟁 범죄를 부인하고 있고, 아직 그 피해자들은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고령의 나이로 힘겹고 외로운 싸움을 오늘도 하고 있습니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15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역사 인식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요?
일본군 '위안부'란 무엇일까?
일제는 전쟁 상황이 궁지에 몰리자 1944년 8월 23일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어요.
청년 남성들을 강제 징집하여 전쟁터로 보내고, 장년들을 탄광이나 오지로 징용을 보낸 것도 모자라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보내더니, 이제 여성들과 어린 여자아이들까지 전쟁 인력으로 사용하려 했던 거예요.
(경찰과 총독부의 압박과 회유책에 의해 전국에서 총 4,385명이 학도병으로 입대하였다.
이는 학도병 지원 가능자 7,200명 중 60% 이상 되는 숫자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정신대에 편입된 여성들은 주로 군수 공장으로 끌려가 감당하기 힘든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그중 일부는 '위안소'라는 곳으로 끌려가 '성 노예' 생활을 해야 했어요.
심지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위안소에 끌려가 군인들을 상대로 성 행위를 강요당하기도 했지요.
일제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성 노예'로 부리기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 사변 때부터 였어요. 당시 성 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15세에서 20세 이하의 가난한 여자아이들이었지요.
이들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일본인의 취업 사기에 걸려 팔려 왔거나, 폭행이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잡혀 온 여인들이었어요. 심지어 빨래하다가, 나물 캐러 갔다가 갑자기 강제로 끌려간 경우도 있었어요. 위안부로 불린 이들은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 본토와 대만, 심지어는 동남아의 미얀마, 말레이시아, 남태평양의 섬들 등 일본군이 가는 전쟁터 마다 끌려 다녀야 했어요.
지옥 같은 위안소 생활
(1944년 9월3일 찍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위안소에 끌려간 여인들은 하루에도 최소 10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심지어는 60명을 상대할 때도 있었다고 해요. 거기에 빨래나 청소, 풀 베기, 음식 나르기 등의 잡일까지 감당해야 했어요. 그 때문에 성병이나 풍토병, 부인병, 우울증, 신경통, 두통 등에 시달리는 이가 부지기수였고, 그럴 때마다 아주 간단한 치료만 받고 다시 위안소에 투입되곤 했어요.
전쟁이 끝나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은 일본의 항복으로도 끝나지 않았어요.
(일왕 히로히토)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위안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참호(야전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 설비)나 동굴에 그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학살한 뒤 묻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심지어는 그들을 모두 배에 실어 기뢰에 부딪치게 하는 방식으로 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
(김순덕, <끌려감>)
위 그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끌려감>이라는 그림이에요.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그림 속 소녀는 군인의 손에 잡혀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잡혀가게 돼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상황의 끔찍함과 두려움이 그림에 그대로 담겨 있어요.
고(故) 김순덕 할머니는 1937년 16세가 되던 해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일제의 말에 속아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간 뒤 중국 상하이 등에서 3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 받았어요. 할머니는 1992년부터 매주 수요 집회에 참석하는 등 평생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다,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나셨어요.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피해자들을 기리고 위안부 문제를 널리 알려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이 소녀상은 일본 대사관 앞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어요.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
일제는 지금도 과거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끔찍한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어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은 일본이 제대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잊지 말아야 할 우리 과거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역사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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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미지는 대구 카톨릭대 캠퍼스 내에 2019년에 부착되어 화제가 된 신입사원 모집 공고문이예요.
정상적인 신입사원 공고문으로 보이시나요?
(대구가톨릭대 캠퍼스 내에 부착된 한 '신입사원 모집' 공고문)
공고문 하단에 있는 QR 코드를 인식해보면 전혀 예상 못한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공고문 하단 QR코드를 인식하면 나오는 이미지)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방식은 '취업 사기로 인한 유괴, 인신매매 등 명백한 강제징용이다'라는 메시지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 된다'는 내용도 적혀있어요.
사실 이 공고문은 공고문의 형식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관심 갖도록 하기 위해 만든 학생 작품으로, 우리에게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 됩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오늘,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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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박영규 만화 실록 시리즈 <만화 일제강점실록 3>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도서 페이지로 이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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