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교사 7일차<교사의 마음-마음을 선택하다>

발행일 : 2024-04-16 06:34  

시대가 흐를수록 겉모양은 얼마든지 따라하거나, 흉내내는 것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자료들이 디지털화되면서 복사해서 여넣는 것은 쉬워지고, 인공지능도 점점 그것을 도와줄 수 있거든요. 네, 무엇이든 처음에는 따라하고 흉내내는 것이 배움이 시작입니다.

좋고 멋진 것들을 따라하는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는 일 중 하나입니다. 저도 그렇게 수업을 배워나갔던 것 같습니다. 선배교사들의 수업과 그 결과물을 제 수업 안에서 펼쳐내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배움의 방법이지만, 누가 만든 결과물을 따라하다보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람과 마주하는 심리학, 교육, , 상담, 치료, 정치, 교육과 같은 분야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누군가의 수업과 방법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수업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정 연수를 받을 때, 협동학습으로 멋지게 수업하시는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선생님을 따라, 저도 바구니와 물품도 사고, (이 수업을 위해서는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도서관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달 수업을 하고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고, 또 원래의 수업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협동학습은 저와 아이들에게 잘 맞는 옷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 저는 그저 선생님의 방법을 따라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모양만 같은 옷을 걸쳤을 뿐, 저에게 맞게 리폼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실패의 경험들은 제가 놓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거지?'라는 방법보다는 그 방법 속에 숨겨진 원리, 그리고 그 방법이 나오게 된 과정을 살피려고 합니다. 어떤 원리가 들어있는지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보게 된다면 조금은 더 세밀한 부분까지 좇아가게 됩니다.

이는 존 듀이의 '반성적 사고' 개념과 연결됩니다. 듀이는 학습자가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왜 그렇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배움의 주체로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않고는 다른 교사들의 수업에서 제대로된 배움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나의 선택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수법이나 교육적인 실천을 보든 어떤 생각과 마음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진정한 배움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중심이 되어야 제대로 굴러가는 가르침이 됩니다. 마음이 제대로 서있지 않고,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왜, 이것을 해야하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되죠. 그 중심에 굳건한 마음이 자리 잡히지 않으면 교사에게서 시작되는 교육이라는 바퀴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고, 설령 굴러간다해도 시간이 흐르면 흔들리고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선택을 하는 마음은 진정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마음이 순수함에서 멀어질수록 그 일이 당장 성공해도 진정한 성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해봅니다. 교육은 결국 사람과 연결된 일인데,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게 되거든요.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얻는다는 '일거양득'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개이득'이라고 표현할 것도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다른 표현을 쓰고 있겠지만, 한 번의 일로 다양한 득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시대가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가 있는 표현이고 가져야 할 마음이라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두 마음을 되도록이면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번에 일로 많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은 다양한 목적을 이루려는 효율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고민에 빠지면, 순수했던 첫 마음을 포기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에서는 "dubius animi" 또는 "duplicis animi"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Dubius"는 "의심하는"을, "animi"는 "마음"을 의미하며, "duplicisanimi"는 "두 마음을 가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하면, 계속해서 저울질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이 사실이죠.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고 싶다고 모이기 시작한 연구회가 연구를 위한 모임이 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수업을 위해 모여 수업을 나눔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타인에게 노출되는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을 위한 수업이 아닌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업이 되기도 하죠.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료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되기도 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던 것이 목적이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진정한 교육은 학생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효율성'입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작고 더딜 때가 많습니다. 돌보고 가르치는 이들의 노력과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육울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을 다 뗴어놓고 존재 자체를 '환대'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모습,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더라고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야.'하는 마음이죠. 그래야 감정적으로 아이들을 대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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